봉지야

2 - 평범한 일상

♡김리아♡ 2023. 6. 1.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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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씻어! 집 안 다 더러워지겠다!”
목덜미 위로 한껏 추켜올려진 엄마의 어깨만 봐도 얼마나 화가 나셨을지 짐작이 갔다.
 
“네, 죄송해요.”
뒤엉킨 흙과 털이 바닥에 닿을세라 최대한 발가락 끝으로 서서 바람보다 빠르게 욕실로 이동했다. 큰 대야에 물을 받고 나서야 무거워진 몸을 담갔다. ‘철퍼덕’ 앉은 탓에 물방울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휴.”  
한숨이 나왔다. 몽글 몽글 공기 방울이 올라오고 뒤따라 크고 작은 흙덩어리들도 올라왔다. 손바닥을 펴서 코 가까이 가져갔더니,
 
“킁킁킁. 아오~.”
손에서 구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똥을 만진 것도 아닌데 이상하네. 헉! 혹시 누가 똥 싼 흙에다 손을 문질렀나? 하아.’
재빨리 손바닥을 앞뒤로 박박 문질러댔다. 큰 대야에 물결이 일더니 순식간에 흙탕물로 변해버렸다.
 
“에잇. 더러워.” 
대야에서 폴짝 뛰어나와 거친 목욕용 잎사귀로 몸 구석구석을 박박 문질러댔다. 얼마나 박박 문질렀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두꺼운 잎사귀가 여기저기 뽕뽕 뽕 구멍을 드러내고 있었다.
 
“솨~.”
깨끗한 물로 ‘촤악’ 끼얹으니 흙덩어리들과 작은 쓰레기 조각들이 발밑으로 씻겨 내려갔다.  몸이 개운해지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이제 좀 말려 볼까.’
온몸을 마구 흔들었다. 털에 붙어있던 작은 물방울들이 흩뿌려지며 뿌연 연기와 함께 섞였다. 보송해진 새하얀 털에 눈길이 닿자 바람과 함께 살랑 이는 게 느껴졌다.
 
‘어? 어디서 부는 바람이지?’
빼꼼히 열린 창문 사이로 빗방울들이 바람에 실려 창 밑으로, 욕실 바닥으로, 얼굴로 떨어지고 있었다. 제법 굵은 빗방울들이었다.
 
‘비가 오래 내리려나?’
창문을 닫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킁킁. 킁킁.”
고소한 참기름 냄새, 적당히 익은 야채 냄새, 알맞게 퍼진 쌀 냄새! 이것은 분명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빠표 야채죽이었다. 피곤한 몸에도 불구하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부리나케 식당으로 뛰어 내려갔다.
 
“거기 서!”
성난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치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져버렸다. 하지만 딱 한군데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바로 눈동자! 애석하게도 눈동자는 성난 엄마의 눈으로 향하고 말았지만.
 
“네 발로 다니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니? 그런 점잖지 못한 행동은 집 없이 숲속을 떠돌아다니는 들짐승들이나 하는 거라고 했지? 네가 네 발로 다닌다면 넌 들개들이랑 다를 바 없어! 네가 들개야?”
 “아. 아니에요. 죄,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 게요”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리고 왜 둘기랑 말을 섞니?”
“둘. 둘기가, 어, 말을 걸어서요.”
“그런 날짐승들이랑 말도 하지 마. 걔네들 몸에 벌레가 얼마나 많은지 아니? 걔네는 비 오는 날에나 씻을까. 아니지, 비 오는 날에는 다리 밑에 있지. 다리 밑에는 흙이랑 쓰레기가 섞인 더러운 빗물이 줄줄줄 떨어지는데. 그 더러운 빗물을 누가 먹는 줄은 알지? 아휴. 너도 덩달아 더러워질까 두렵구나. 다시는 그런 날짐승들이랑 말도 하지 마!”
속사포 같은 엄마의 질책에 저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네. 죄송해요.”
“도대체 내가 몇 번을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새하얀 털이 분홍빛을 띠기 시작한 걸 보면 생각보다 더 많이 화가 나신 게 분명했다. 내가 자꾸 쪼그라들어 콩알만 해 질 것 같았다.

 ‘아. 난 왜 이럴까? 왜 길냥이랑 비둘기만 보면 엄마 말씀이 안 떠오르지?’
 그때였다.
 
“자, 진정들 하시고, 야채죽 대령이요!”
항상 나를 구해주시는 우리 아빠! 거기다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야채죽까지! 아빠가 식탁에 올리신 야채죽을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지는가 싶더니 입 밖으로 혀가 쭉 나왔다. 꼬리는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더니 이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입가에는 침이 고이고 헥헥 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두둑!”
바닥으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나, 엄마, 아빠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으로 향했다. 엄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고, 아빠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침 바닥에 흘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니? 바닥에 침 흘리는 건 들개들이나 하는 교양 없는 행동이라고 했잖아! 도대체 엄마를 오늘 몇 번이나 실망시킬 거야?”
“음, 그래. 아지야. 교양 있게 행동해야 나중에 멋진 개가 될 수 있단다. 알았지? 이제 그만하고 식기 전에 어서들 먹자!”
“네.”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후 아빠 자리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소리 나지 않게 수저를 들고 수저 끝에 야채죽을 살짝 떴다. 엄마의 눈과 마주치지 않았건만 얼굴이 따끔따끔 한 걸 보니 엄마가 쏘아보고 계신 것이 분명했다. 야채죽을 혀로 한 번에 핥아 목으로 넘겼지만 마치 큰 돌덩이를 삼키는 것처럼 목에 걸렸다 넘어가기를 반복했다. 
 
“호로록, 호로록.”
 “추릅, 추릅.”
 “꿀꺽.”
 야채죽 먹는 소리만 적막을 깰 뿐, 조용한 식사는 계속되었다.
 
“저, 이만 올라가 볼게요.”
 “그래, 피곤할 텐데 올라가서 쉬어.”
 아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해 주셨으나 엄마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들린 짤막한 엄마의 음성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렇게 엄마와 시선도 마주하지 못한 채 방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끼익.”
무거운 마음 때문인지 문도 더디게 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약한 불빛만이 내 방을 비출 뿐이었다.
 
“끼익, 탁!”
 세상의 모든 빛을 차단한 채 어둠 속에 혼자 남았다. 팔을 앞으로 뻗어 더듬거리며 한 발짝 한 발짝씩 조심스레 발을 뗐다.
 
‘음. 이건 책상. 이건 촛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야겠네.’  
조심스레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니 손끝에 폭신함이 묻어났다. 

‘드디어 도착!’
몸을 던져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아~ 포근해~.”
엄마의 털로 손수 만드신 폭신한 이불! 눈을 감았다. 잠이 쉽사리 들기를 바랐던 건 아니지만 당최 잠은 찾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교양이 대체 뭐 길래. 다들 교양 있게 행동하라고 할까? 왜 들짐승, 날짐승들과 이야기를 하면 교양이 없는 걸까? 더러워서? 집이 없어서? 더러운 것을 먹어서?’
 오늘 있었던 일들과 엄마께 들었던 말들이 교차되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져나갔다. 그럴수록 답을 찾기는커녕 의문만 더해갈 뿐이었다.
 
“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더니,

“탁탁 탁탁탁.”
그제야 들리는 빗소리. 비가 창문과 집 외벽을 때리는 소리에 덜컥 걱정이 밀려왔다. 평소 듣던 소리와 달리 거센 빗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창문 쪽으로 걸어가 양쪽 여닫이 손잡이를 잡아 살짝 열어보려는 찰나.
 
“으악!”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방안 가득 밀려들어오는 거센 비바람에 양쪽 창문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요란하게 움직였다. 열린 창 사이로는 굵은 빗줄기가 마구 떨어져 바닥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생겨나고 있었다. 

‘헉! 방이 물바다가 되기 전에 빨리 창문을 닫아야겠다!’
요란하게 움직이는 나무 창문에 맞을세라 망설인 것도 잠시, 이내 용기를 내어 창문을 잡으려 두 손을 뻗었다.
 
“아야!”
빠르게 움직이던 창문에 손등을 맞고 말았다. 손등이 얼얼했지만 비구름에 가려진 어스레한 달빛만으로는 손등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다. 
 
‘한 번에 하나씩만!’
오른쪽 창문 옆 벽으로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요란하게 움직이는 창문을 주시하며 어느 순간 멈칫 느려진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리고 재빨리 손잡이를 잡아 온몸으로 밀어 닫았다. 
 
‘역시 난! 자, 이제 남은 창문!’
오른쪽 창문을 성공적으로 닫은 민첩함에 감탄하며 왼쪽 창문 옆 벽으로 돌진해 방금 전 보다 더 빠르게 남은 창문마저 닫았다. 
 
‘아지야. 잘했어!’
기쁨에 가득 차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힘없이 침대에 털썩 앉으니 거센 빗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부모님은 잘 주무시고 계시려나?’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문으로 향했다. 다행히 어둠에 익숙해져 사물의 윤곽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거실에 밝혀둔 촛불 덕에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부모님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끼익.”
문틈 사이 침대로 부모님이 주무시고 계신 모습이 보였다. 왠지 모를 안도감에 조심스레 방문을 닫았다. 다시 계단으로 올라와 방으로 들어가는 내내 웬일인지 잠든 부모님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암!”
크게 벌려진 입 사이로 습한 밤공기가 훅 들어왔다. 턱이 안 빠진 게 신기할 정도였다. 밤공기 탓인지, 몸도 노곤해지고 눈꺼풀은 점점 내려오기 시작했다.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덮었다. 포근하고 따스했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다.

 

2 - 평범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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