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먹어 봐.”
길냥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얼굴 밑으로 들이밀었다.
“고마워.”
그릇 안에는 맑은 녹빛 국물에 숨이 죽은 어린잎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후!”
모락모락 피어나던 김이 입김을 만나 사방으로 흩어지며 길냥이와 둘기의 모습이 드러났다. 길냥이는 뜨거운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어린잎을 양손으로 건져내 입에다 게걸스럽게 집어넣고 있었고, 둘기는 그릇에 머리를 박은 채로 후루룩 들이키는데 여념이 없었다.
“있잖아. 얘들아.”
길냥이와 둘기는 입에 어린잎을 대롱대롱 매단 채 나를 바라보았다.
“저기, 너희들 수저 없어?”
“그런 거 없거든요!”
둘기가 매달린 어린잎을 쪼옥 빨아먹으며 말했다.
“네 손 뒀다 뭐해!”
길냥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바랠 걸 바라자!’
둘기와 길냥이랑은 더 이상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아. 이걸 어떻게 먹지?’
길냥이는 그릇을 입에 댄 후 고개를 치켜들었다. 국물이 꼴랑꼴랑 목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짙은 녹빛 국물은 입 주변으로 질질질 흘러내렸다.
‘아. 진짜 무식하게도 먹네.’
둘기는 그릇에 처박듯이 한 머리를 들어 올렸다. 머리 꼭대기에서 얼굴 전체로 녹빛 국물이 뚝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는 건 덤이었다.
“꼬르르르륵, 꼬르르르륵.”
뱃속 알람소리가 심하게 울리고 있었다.
“꿀꺽. 꿀꺽.”
단숨에 국물을 들이켜고 나니 허기가 조금은 가신 듯했다. 하지만 그릇을 내려놓으면서 안쪽에 다닥다닥 붙은 어린잎들을 보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저것들 조금만 더 먹고 싶은데. 음. 붙어있는 잎까지 먹다 보면 무식해 보이려나. 아니지 뭐 쟤네들은 삶 자체가 무식하니 내가 먹는 모습도 크게 개의치 않을걸. 히히.’
혀를 길게 뽑아 그릇 안쪽부터 샅샅이 핥기 시작했다. 다행히 녹빛 잎들은 단 세 잎만 빼고는 혀에 착착 감겨 힘들이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교양 있게 그릇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먹다 남은 세 잎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에라 모르겠다.’
손에 묻은 때가 닿을 세라 아주 조심스럽게 잎 가장자리 부분을 손끝으로 잡아 입으로 쏙 집어넣었다.
‘음~. 부드럽고 맛있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머지 잎들도 집어 입 속으로 넣으려는 순간 낄낄거리는 길냥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고. 그렇게 맛있었어요? 이야~ 새 그릇 같은데?”
길냥이가 다가와 텅 비어버린 내 그릇을 보며 이죽거렸다. 속내를 들킨 나는 어김없이 벌건 홍당무로 변하고 있었다.
‘안 돼. 뜨거워지면 안 돼! 안 돼!’
빨리 화제를 돌려야 했다. 뜬금없이 생각난 건,
“저. 저기. 오늘이 며칠이야?”
“낄낄낄. 홍수 이후로 해가. 음.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번 떴으니 오일 지났네.”
“둘기야, 그중에 하루는 흐려서 해가 안보였어. 그러니까 육일 지난 거야.”
실실 웃던 길냥이도 맞장구를 쳤다.
“아. 오륙일 정도 지난 거구나. 음. 그리고 잘 먹었어. 정말 고마워.”
벌갰던 얼굴이 가라앉으면서 마음 편하게 그릇을 내려놓았다.
“설마 고맙단 말만 하고 입 싹 닦으려는 건 아니지?”
길냥이가 손가락 위에 그릇을 뱅글뱅글 돌리며 물었다.
“어? 뭘 닦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커다래진 눈을 하고 길냥이에게 되물었다.
“으휴, 그릇 닦으라고! 설거지하고 와!”
길냥이는 그릇을 내 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나 설거지해본 적 없는데…….”
얼떨결에 그릇을 잡고 만 손가락들이 그저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부터 해보면 되겠네. 내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적당한 잎사귀 뜯어다가 강가 가서 닦아 와. 아주 아주 깨끗하게! 크크크”
둘기도 질세라 잽싸게 그릇을 내 앞으로 밀치며 말했다.
“아. 알겠어.”
굳어버린 입꼬리를 마지못해 올리며 대답했다. 그릇 세 개를 켜켜이 쌓아 강가로 향했다.
“아오! 살려주고, 부축해 주고, 밥 줘서 내가 설거지한다! 겨우 풀국 하나 줬으면서 생색은! 그나저나 잎사귀는 어디 있는 거야?”
두리번두리번 시야를 넓히니 눈에 들어오는 건 전부 잎사귀뿐이었다.
‘아참. 여기 숲이지. 저건 너무 작고, 이건 너무 크고, 또 저 위에 건 너무 얇고. 앗! 찾았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앞뒤로 촘촘하게 털이 박혀있는 잎사귀를 발견했다. 다행히도 잎사귀는 쉽게 뜯을 수 있었다.
‘빨리 강에 가야겠다.’
조금 걷다 보니 나무 사이로 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흙탕물로 넘실대던 무서웠던 그 밤을 떠올리게 하는 강이 아니었다. 맑고 또 잔잔한, 예전의 강 모습 그대로였다. 그동안 피로와 배고픔 때문에 강이 되돌아온 것을 눈치재지 못했었나 보다.
“홍수 지나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물도 맑아지고, 깊이도 예전 그대로네.”
맑은 물에 그릇을 담갔다. 그리고 잎사귀로 그릇 안쪽을 쓱쓱 문질러 헹궈냈다. 설거지에 제법 소질이 있다고 느꼈을 찰나 눈물 한 방울이 톡 잎사귀로 떨어졌다.
‘식사하고 나면 엄마 아빠도 이렇게 설거지하셨겠지? 귀찮고. 힘드셨을 텐데. 설거지를 내가 해보겠다. 아니. 설거지란 단어조차 떠올려 본 적이 없었는데…….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흑흑흑.”
한두 방울씩 떨어진 눈물이 강물에 채 섞이기도 전에 쏜살같이 흘러내려갔다.
어느새 깨끗해진 그릇을 켜켜이 쌓아 둘기와 길냥이가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난히 무거운 발걸음처럼 눈물을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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